조선일보[충청·강원] 2003년 10월 29일자
“태권도가 너무 좋아요. 열심히 배워서 어린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습니다.”
필리핀 소녀들이 불우한 환경을 태권도로 극복하고 충북 진천에서 열리는 ‘2003 세계 태권도화랑문화축제’(26일~11월 1일)에 참여해 눈길을 끌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열다섯살 동갑내기 여고생 엘비라, 웨이셀, 아날린 등 3명. 이들은 이번 화랑문화축제에 청소년부 태권도 체조 부문에 출전, 선무(禪舞) 형태의 창작 태권도를 선보여 금메달을 받았다. 아직 빨간띠와 파란띠의 초보 수준이지만 엄숙하면서도 특이하게 경기를 펼쳐 높은 점수를 얻었다.
필리핀 소녀들의 태권도 사랑은 3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들이 너무 가난해 마닐라 슬럼가에서 불우아동으로 배회하던 이들은 현지 ‘벌라니’ 재단의 고아원에 들어가면서 학교에 다니고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제3세계 국가에서 활발히 봉사활동을 펼치는 세계청년봉사(KOPION) 요원들은 태권도 교육이 한국을 알리고 청소년들을 계도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소녀들은 진천에서 매년 태권도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 초부터 코피온 현지 자원봉사자의 지도를 받아 맹훈련에 들어갔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돌아와 틈틈히 태권도 품새를 익히고 밤에도 2시간씩 연습했다. 장래 태권도 지도자가 되는 것이 소녀 삼총사의 공통된 꿈이다.
엘비라양은 “프로 수준으로 태권도를 열심히 배워 아시안게임에 꼭 출전하고 싶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들이 한국에 오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소녀들이 모두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코피온측은 부랴부랴 서류를 갖췄고, 마닐라 주재 영사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왕복 항공료와 체류비 등 각종 비용도 현지 한국인 사업가와 충청대 등의 온정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코피온 사무국 이주영(여·38)부장은 “태권도를 배우면서 소녀들의 생활습관과 의식이 뚜렷하게 달라졌다”며 “불우한 환경을 딛고 태권도에 열중하는 외국 소녀들이 너무 기특하다”고 말했다.
유태종기자 youh@chosun.com